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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천시장 입구에 홀로있는 미술 평론가 김강석

세명페인트 방수공사 2011. 7. 19. 18:33

 

 

 

 

<퍼옴>

《신태범의 부산문화 野史》... <19>미술 평론가 김강석

미술평론가 김강석(金剛石). 그의 이름은 아직도 부산의 많은 화가들 사이에 강력한 충격의 그림자로 남아있다. 마치 잘 벼린 칼을 휘두르듯 한 그의평문은 가혹하고 가차 없었다. 어떤 화가의 그림이건 그의 비평의 칼날에한번 걸려들었다 하면 조각조각 해부되었다. 60~70년대에 활동한 화가들 치고 그의 날카롭고 무자비한 비평의 쾌도난마에 상처입고 가슴앓이 하지 않
은 이가 드물 정도였다.
 『시골 이발소에 걸어놓기 꼭 알맞은 그림을 그려왔으면서도, 남의 눈치를 살펴가며 해적판 그림을 그리면서도 팔자에도 없는 대학교수나 미술단체의 감투를 가지고 으스대는가 하면…(중략) 간이 부을 대로 부은 소리만 하고 다니니 기가 막힌다…』 1970년에 발표한 「가짜화가」라는 글의 일부다. 평문이라기엔 지나치게 직설적 위압적 공격적 도발적이다. 대단한 지적자신과 용기 없이는 쓰기 힘든 글이기도 하다. 독화살 같은 그의 비평을 두고 몇 차례 반박과 논쟁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그의 입지만 오히려 견고하게해주었을 뿐이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귀가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던 건장한 청년 둘이 들개처럼 그를 덮쳤다. 그들은 쇠공이 같은 주먹과 발길로 무차별 그를 짓이겼다. 깡마르고 빈약한 체구의 그는 빈 알루미늄캔처럼 구겨졌다. 『야 일마야, 억울타꼬 생각마라…! 글로 사람 까기나 주먹으로 사람 잡기나 같은 거아이겠나…! 빨리 황천 가기 싫으모 앞으로 조심해라…!』 그들은 침을 탁뱉고 휘파람까지 날리며 유유히 사라졌다. 혹평에 견디다 못한 몇몇 화가들이 그렇게 폭력으로 화풀이를 했다. 그러나 그의 평필의 위력은 조금도 꺾이기는커녕 기세를 더하기만 했다.
 경북 의성이 고향인 김강석은 1932년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광복 후1948년에 귀국해 대구상과대학(영남대학)에 편입했으나 6·25전쟁으로 자퇴한다. 그는 처음 대구와 대전을 오가며 신문 잡지 등에 문학평론을 발표하는 자유기고가 생활을 한다. 전혀 연고도 없는 부산으로 그를 불러들인 사람은, 주의 깊게 그의 글을 지켜본 「민주신보(1962년 군사정권이 폐간시킴)」 문화부 기자 김규태(현 국제신문 논설고문)였다. 1959년의 일이다. 그해 9월 「민주신보」에 「창작의 시공간 문제」라는 미술비평을 발표하면서김강석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다.
 김강석은 직업 없이 오로지 일정치 않은 빈약한 원고료 수입만으로 생계를 꾸려갔다. 혹독한 가난과 싸우는 삶이었다. 독신에 홀어머니를 모신 그는대청동 산허리의 기울어 가는 판잣집에서 벼랑처럼 아슬아슬한 나날을 지탱했다. 가난은 오히려 그에게 더욱 타협을 거부하고 오기를 부리게 했을까.
그는 한때 「조형미술연구소」를 열어 미술 인재를 키우고, 「색채문제연구
회」를 만들어 일반인의 미의식을 높이려 노력했다. 미술용어집과 디자인용어집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평단의 선배인 이시우에겐 깍듯이 예우를 다하였으며, 청초이석우가 병마로 쓰러지자 입원비 모금 전시회 「난류전」을 주도한,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이었다. 결국 가난과 고독과 폭음에 지친 그의 육신에결핵까지 덮쳐, 1975년 44살 한창 나이에 그의 서슬 푸른 붓은 영원히 꺾이고 만다.
 여러 가지 비판과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난 연대의 부산 화단에 새로운 각성의 등불을 높이 밝힌 사람이었다. 그가 죽고 나자 그의 평필이 무서워 개인전을 미루었던 여러 작가들이 다투어 전시회를 열었다는 말이 떠돌정도였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지금도 김강석 같은 사람이 그립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 소설가/국제신문